나의 이야기

바람이 불고 있다

단풍들것네 2020. 3. 18. 04:01

뒤뜰 한쪽에서 잔가지 정리를 하고 있던 아내,

돌아선 모습에 흰머리가 두드러져 보인다.

미장원 갈 때가 지났지만 요즈음에는 사람들 모이는 곳에 가기가 망설여진다더니.


휴일엔 좀 쉬어도 될 텐데...



같이 거들어야 할 것 같아 뜰 안으로 내려서니 아내의 왼손에 흰 붕대가 감겼다.

부엌칼에 스쳤는데 소독을 하고 뒤처리를 했으니 걱정할 일은 아니라며

붕대 감긴 왼손을 뒤로 감추었다.


겨우내 눈바람에 시달린 뜰 정리도 해야 하고,

벌써 히아신스, 튤립, 피오니아의 꽃망울이 올라오는데..

뒤돌아보는 웃음이 메마르다.



우두커니 뜰 한편에 서 있길래 아차 했었는데,

아침 일찍 아이에게 다녀왔을 것이다.

오래 투병 중인 아이에게 들렸다 오는 날이면,

아내는,

오랫동안 뒤뜰에서 머물거나 오늘처럼 예상치 못할 사고를 일으키기도 한다.


염색 빛이 빠져 바래고 희어진 머리와

뒤로 감춘 상처 입은 손에,

정원용 갈퀴를 쥔 모습이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을씨년스럽다.


흔들려 보이던 웃음도 그렇지만,

피맺힌 흰 붕대가 몹시 거슬려

언짢기도 한데 통증 같은 저릿함이 올라와 목덜미를 거머쥐었다.


병원에서 치료받아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 하니 걱정은 덜었지만,

언짢은 마음을 누를 수 없어 집을 나서며

큰소리로 못 박듯 핀잔을 했다.



바람 좀 쐬고 올테니

많이 늦을 거요.



가끔 찾게 되는 시골길은 주말이라 한적하다.

이곳은 중세기 생활상을 고집하는 메노나이트 사람들의 시골 동네다.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시골길이 따뜻하다.

눈 녹은 들판의 파릇한 정경이 풋풋하니

저절로 자동차 창문을 열게 된다.

그래도 아직은 밀려드는 바람이 차다.



자동차를 피해 갓길에 비껴선,

검은 머리 쓰게 와 검은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아이와 함께 손을 흔드니

매연 품는 자동차가 피해가 될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속도를 줄이고 같이 손을 흔들며

한동안 길 가장자리에서 머문다.



높다란 건초 사일로 사이로

벽난로용 장작이 산더미만큼이나 쌓였고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엔 크리스마스 트리용 편백나무가 줄지어 섰다.

농장 안쪽의 커다란 화덕에서는 메이플 시럽 졸이는 연기가 뭉글뭉글 치솟는 정경이 무척 평화롭다.


땅 파서 옥수수를 뿌리고

나무 키워서 긴 겨울을 준비하고

직접 우유 짜서 치즈를 만들고

소똥 일구어 퇴비를 만들고

마차에 묻어나는 말똥 냄새를 개의치 않는

신앙과 믿음이 종교를 넘어 삶 자체가 되어버린 이들의 일상이

어쩌면 사람다운 삶일까.

세속적인 것에서 한걸음 벗어난 삶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인가?



어쩔 수 없이 주변과 비교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지만,

내 처지가 어렵다고

남과 비교하여 나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 텐데,

아이 일로 오랫동안 힘들어하는 아내를 보며 떠오르는 생각이다.



여보,

나의 아내여,


부스러질 듯한 메마른 웃음을 걷어요.

당신을 탓할 바람은 이젠 더 이상 불지 않을 겁니다.


푸른 하늘 아래,

드넓은 들판 위로,

차가운 듯 따스한 바람이 스친다.


바람이 불고 있다.



  "얼마나 먼 길을 걸어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까

   ......

   바람이 불고 있네.. 바람이 알고 있지.. (밥 딜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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