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남쪽 하늘에 반쯤 이지러진 달이 걸렸다.
겨우내 흐린 탓에 맑은 하늘 보기가 쉽지 않았는데,
풀린 날씨로 아침에 뜬 달까지 볼 수 있으니 한결 몸과 마음이 가볍고
이젠 동네 곳곳에 기러기 울음 소리가 사뭇 커졌다.
얼음이 반쯤 덮인 동네 연못에 기러기 여러 마리가 앉았다.
그래도 아직은 바람이 찬데 춥지는 않을까?
며칠 전만 해도 이웃집 지붕에 앉았던 한 쌍을 보고 종일 들뜨지 않았던가.
바짝 봄이 다가왔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가벼워 우중충하고 우울했던 색깔을 걷어내니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상쾌한 아침이다.
오전 일찍 은퇴한 간호원 왠디가 오랜만에 가게에 들렀다.
반가운 마음에 자랑삼아 봄소식을 전하고 싶어
며칠 전에 찍었던 지붕에 앉았는 기러기 사진을 보여주니,
그래,
그럼 이 봄소식은 어떠니라며 전화기 속의 사진을 보여준다.
땅을 조금 헤집고 노랑과 빨간 꽃봉오리가 자잘하게 박혀있다.
앞뜰에서 벌써 꽃망울을 보았다는 목소리에 생기가 넘친다.
양지바른 동네는 벌써 꽃망울이 올라오는가 보다.
다른 한 장의 사진에는 노오란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길래
어떻게 된 영문이냐며 놀랐더니,
활짝 웃으며 플로리다의 별장 집 사진이라고 해서 모처럼 같이 웃었다.
열심히 일하고 은퇴한 왠디는 겨울에는 플로리다 별장에서 지낸다.
그녀가 집으로 되돌아 왔으니 계절이 바뀌는 걸 실감한다.
출입문이 많이 지저분하다.
겨우내 눈바람을 막아 주며 치른 작은 상흔이다.
풀린 날씨에 뿌연 먼지가 유독 드러나 보이니 묵은 때를 벗겨야겠다.
얼룩얼룩 덮인 먼지에 세정제를 뿌려 말끔히 씻어내고
반짝이는 유리 문에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비추니,
바래어 윤기 잃은 머리칼...
이발을 해야겠네.
거뭇거뭇 한 수염...
게으름 피우지 말고 면도도 자주 해야겠고.
안경테는 왜 이렇게 비틀어져 보일까...
안경점에도 들러야겠고.
두터운 방한복도 벗어야 할 것 같네...
고스란히 남겨진 지난 계절의 자국이 도드라지게 다가왔다.
잠깐 열어둔 출입문으로 그새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쪼르르 뛰어오더니,
계산대 앞에서 딱 멈추고선 종을 달랑 달랑 흔든다.
관심을 끌어보려는 듯 빤히 바라보는 초롱한 눈망울이 이쁘다.
그냥 지켜 보라며 뒤따라 들어온 어머니가 손짓을 한다.
장난감 벨(종)이 마음에 드는지 종일 들고 다니며
사람들 앞에서 흔드는 걸 좋아한다며 아이의 어머니가 조용히 웃었다.
천진한 모습이 귀엽다.
태도가 다부지기도 하고 뎅그렁 뎅그렁 거리는 소리가 제법 선명해서
나도 모르게 따라 빙그레 웃게 된다.
뎅그렁 뎅그렁
뎅그렁 뎅그렁
아이야,
네가 종을 쳤으니 가게 문 닫을 시간이라는 말이냐,
이 할아버지가 가게 문을 너무 늦게 열었다는 말이냐,
아니면
반가운 봄소식을 데리고 왔다는 말이냐.
뎅그렁 뎅그렁
뎅그렁 뎅그렁
소란스러운 세상에 이 아이마저 또 하나 소음을 더하고 싶을까,
소란스러운 세상에 이 아이의 깊은 눈망울 같은 꿈을 심고 싶은가.
소란스러운 세상에 이 아이의 맑은 영혼처럼 정정한 마음을 전하고 싶은가.
아이가 흔드는 종소리 곁에
지난 계절의 자국이 고스란히 남겨진 나에게도
봄은 다가올 것이다.
바람 냄새가 보드랍다.
된장 냄새같이 훈훈하고 구수한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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