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늦게 오긴 했지만,
칠월의 날씨는 무덥다.
다행히 오늘은 습기도 없이 적당한 날씨여서
앞뒷문을 열었더니 자연의 바람이 시원하여 절로 상쾌하다.
에어컨의 찬바람에 불편했던 마음은 더욱 하늘이 높아 보인다.
희미하게 걸려있는 조각달이 새삼스러워 사진 한 장 담아 보려는 데,
파란 하늘은 가슴으로 내려앉아 조그마한 조각달을 밀어내듯 흔들고
물결일 듯 흔들리며 솟아나는 옛 생각,
날갯짓 하는 아린 조바심은 결국 길을 나서게 한다.
열어놓은 차창으로 밀려드는 바람은 머리칼을 마구 흔들어 놓고,
맞바람을 맞은 온몸은 그 무게에 힘겹다.
시골길에서도 서두르는 조급함이 민망해 속도를 줄이니
여름을 건너뛴 듯한 서늘한 바람이 그제야 싱그럽게 다가오고
가늠키 어려운 광활한 들녘은 깊고도 넓어
망설임 없이 나선 길 위에서의 여유가 아련하고 애잔하다.
나지막한 산등성 자락에 자리한 고향 집은 뒤뜰이 넓었고,
뒤뜰에 연하여 비스듬히 시작된 산등성은 오랫동안 버려진 어느 종가의 선산이다.
산등성은 낮았지만 산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만큼 소나무가 우거졌고
계집아이의 봉긋한 젖같이 솟았던 오랜 무덤들 주변엔
봄, 여름에는 잔디들이 싱그러웠고
겨울인 데도 양지쪽의 누렇게 변한 잔디 위로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만큼 아늑했었다.
햇볕 좋아 맑은 날,
산등성이 시작되는 뒷마당에서 어머니는 솟대 같은 긴 장대를 양쪽에 세우고,
말갛게 씻은 이부자리에 풀을 쑤어 하늘 높이 널었다.
바람에 나부끼던 길고 넓었던 이부자리
희고도 희어 눈이 부셨던 이부자리는
만선을 알리는 고깃배의 깃발 마냥 흔들렸고
상여를 뒤따르는 길고 긴 만장같이 나부꼈다.
이부자리가 마를 때까지
잔디 위에 들어 누워 책을 읽다 잠이든 난,
깨어나면 뭔지 모르게 그만 슬퍼져 어머니에게 달려갔고
말이 없던 어머니의 품에서는 마른 풀냄새가 났다.
젊었던 내 어머니,
파란 하늘은 그리 맑고 높았는데
말이 없던 어머니는 무었을 하늘에서 말리려고 했을까.
피지도 못하고 가버린 어린 누이.
간간이 들리는 뱃고동 소리는 소금기 머금은 바람과 함께 묻어왔고
그런 날엔 아버지는 밤이 늦어 들어왔다.
모자를 눌러써도 검게 변한 아내,
올해도 어김없이 뒤뜰에서 지낸다.
선크림이라도 바르면 좋을 텐데 손에는 호미가 들려 있다.
뒤뜰 가꾸기에는 우리네 호미만큼 좋은 게 없다는 아내.
크지 않은 뒤뜰을 십오 년 넘게 돌보았으니
이젠 뭘 그다지 할 일이 없을 텐데 오늘도 뒤뜰에 나와 않았다.
‘할 일이 그래도 많아요
물도 주고,
잔가지도 치고,
벌레도 잡고..’
들녘엔 벌써 밀이 익었더라며 오늘 담아온 사진을 보여주니
밀이 익을 때도 되었지,
뭔 대수라는 듯 무덤덤한 아내에겐 마른 풀냄새가 났다.
어릴 적 어머니 품에서 맡았던 슬퍼도록 애잔했던 그 마른 풀냄새가 났다.
아내에겐
아직도 젊은 날의 어머니처럼 따가도록 맑은 햇볕에 말려야만 하는 세월인가…
아내의 아픔도 벌써 십오 년이다.
그래,
이 계절엔,
여름 하늘이 만들어낸 이 깊고 넓은 들녘보다,
고깃배는 깃발을 나부꼈고,
뱃고동 소리는 소금기를 머금어
고운 바다 빛에 푸른 물거품이 일던 고향 바다에 가고 싶다.
얼굴 검게 그을린 가여운 나의 아내를 위해..
((대부분의 남자들이 바다에 나가서 생선 배나 찔러먹고 사는 이 고장의 조야하고 거친 풍토 속에서
그토록 섬세하고 탐미적인 수공업이 발달한 것은 이상한 일이다.
바다 빛이 고운 탓이었는지 모른다 - 김약국의 딸들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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