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360여 년 전 기록 - 오랑캐

단풍들것네 2017. 7. 18. 08:18

 요즈음 시간 나는 데로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는 중이다.
우선 그 방대함에 놀라고 세세한 기록의 치밀함에, 이런 쪽에 문외한인 이공계 출신인 내가 보아도 분명 자랑스러운
민족의 값진 유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위대한 선조들이다.
혹, 조선왕조실록 원본을 보는 것으로 오해하실 분은 없겠지만,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서 국역 된 자료를 볼 수 있다.


 태조 때부터 시대순으로 살펴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기에,
왕조 500년 영욕의 역사 중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부분을 먼저 살펴보기로 했다.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치욕스러운 역사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고 다음은 '병자호란' 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명성황후 시해’는 고종의 실록이 일제하에서 편찬되어 사료가 왜곡되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황후가 시해되고 능욕되었다는 사실에 아직은 차마 살펴볼 마음의 준비가 덜 된 탓에 인조실록의 '병자호란' 을 먼저 보는 중이다.


 ‘삼배구고두 (三拜九叩頭)’로 기록되는 인조의 삼전도 굴욕은 통탄할 치욕스러운 역사의 기록이다.


 차가운 강변 바람이 매서운 정월의 한강 나루터.
상투를 풀어헤치고 상민들이 입는 남염의를 걸친 맨발의 인조는,
한강 백사장에 꿇어앉아 선혈이 낭자해지도록 맨땅에 이마를 찧어 박아야 했고,
이마 찧는 소리가 축대 위에 걸터앉은 淸 태종의 귀에 들리도록 해야 했다고 실록은 전한다.
참혹한 기록이다.


   -  군신의 예와 부자의 예로 300년을 이어온 천자의 나라 明을 거스르고,
       어찌 '오랑캐'의 나라 淸과 화친을 할 수 있겠느냐  -  가 빚어낸 17세기 조선의 모습이 실록 읽는 자의 가슴을 친다.





 이 굴욕이 어찌 임금과 조정의 무능함으로만 치부할 수 있겠는가. 

조선왕조 개국 이래로 뿌리내린 사대의 사조 탓이다.
실록 곳곳에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생생한 사대의 망령을 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조선의 백성을 힘들게 하였던 사대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짚어 내는 것이 실록 찾아보는 이의 숙제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병자호란 즉 '오랑캐'의 난 탓에 뜬금없는 나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조금 이야기 해야겠다.
 
 나의 조모께서는 105세까지 장수하신 분이다.
1897년 태어나셔서 2002년에 돌아가셨으니 3세기를 거쳐 사셨다.


 나의 집안은 단명 집안이었다. 조부, 증조부, 고조부,, 선대 어른들 모두 환갑을 넘기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증조부께서는 단명의 고리를 깨기 위해,
전남 고흥의 장수 집안으로 유명한 댁 (할머니의 친정 ) 에서 며느리를 보셨다고 들었다.
그런 증조부의 바람과 할머니의 강인함이 더해진 탓인지 선친께서는 85세까지 사셨고,
지금까지 여섯 숙부와 고모 모두 80을 넘기셨다.


 돌아 가실 때까지도 정갈한 정신이었던 조모께서는 나의 이민 결정에,


   “얘야! 선영을 버리고 왜 그런 ‘오랑캐’의 나라로 간다고 하느냐?” 라고 말씀하셨다.
 
 온 마을 사람이 흰옷의 상복을 하고 큰길에 나와앉아 곡을 했던 고종과 순종의 장례식을 기억하시고,
쌀과 식량 등속을 바꾸러 종종 동네에 나타났던 왜인 (왜놈)들을 - 새까맣고 조그마한 체구들이 꼭 원숭이 같았으며,
훈도시와 나막신을 신고 긴 칼을 차고 다녔다고 기억하셨던 나의 할머니에겐,
당연히 캐나다란 나라가 무도하고 막돼먹은 자들만 우글거리는 ‘오랑캐’들의 땅 이었을 테다.
 
 내 할머니의 걱정,
그래 이곳 ‘오랑캐’의 땅에서 내가 가꾸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으며 또 무엇을 일구었는가?
 
 갈수록 편협하고 옹졸해진다는 아내의 말은 정말 수긍하고 싶지 않다.
이곳을 오기로 했었던 이유도 이제는 망각한 채,
여전히 목마름을 탓하며,
감사해 할 줄 모르고,
작고 사소한 것의 부당함을 삭여내지 못하고,
너그럽게 베풀기 보다는 아직도 시시비비를 가려야만 하고,
내가 이젠 모든 것 모두에게서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애써 외면한 채,
또 이제는 되돌아 가고픈 꿈을 꾸는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360여 년 전 왕조실록의 '오랑캐' 탓에 오늘 코네디언이라 불리는 한 사람이 착잡하다.   (Nov.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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