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영자씨! 34년 만인가요?

단풍들것네 2017. 7. 25. 08:16

 매 주일은 아니지만 한 달에 한 번은 아내의 뜻에 따라 교회에 같이 가야 한다.
예배시간에 졸지 마라, 마른기침 하지 마라, 다리 꼬지 마라, 성경책 뒤적이지 마라, 면도는 깔끔히 했느냐.
아내는 쉴 사이가 없지만, 

하이웨이에서 운전에 집중해야 하는 나는 아직도 남을 의식해야 한다는 이런 참견이 고역스럽기만 하다.
그렇게 면박 받아 가며 서둘렀지만, 예배시간에 늦었다. 
빈 자리는 강대상과 성가대 정면의 맨 앞자리 뿐. 
죄 지은 모양 허리를 숙이고 가로질러 가까스로 성가대 바로 앞에 자리를 잡으며,
오는 순서대로 앞줄부터 착석한다면 조금 늦은 사람들이 이렇게 불편하고 민망스럽진 않을 텐데,
왜 사람들은 꼭 뒷자리 부터 엉뎅일 붙이는 것이냐며 성스러운 장소에서 투덜거렸다.
 
 나이 지긋한 어떤 분이 대표 기도를 시작한다.


    " 한 주일 동안 저지른 저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누구에게 누구에게...  축복하여 주십시오. "


 면박 받아 가며 운전한 뒤라 쏟아지는 졸음에 껌벅하면 큰일이니 열심히 저분의 기도를 들어야 한다.
막힘없는 기도가 매끄럽기도 하다.
근엄하기도 하고, 밤 새워 연습은 얼마나 했을까.
오늘도 어김없이 용서를 구하네, 그런데 언제까지 저 용서를 구하려는고 ? 


 장엄한 성가대의 찬송에 번쩍 졸음이 깬다.
이 성가대의 찬송만큼은 고결하고 성스러워 어쩔 수 없이 부대 겪던 지난 일상이 새삼스럽다.
그런데 성가대 중간 쯤 한 여인의 낯이 익다.
누굴까 ? 어디서 본듯한 얼굴인데 ..
되돌아 오는 길의 차안에서 낯익은 여인 생각에 골똘해진 낌새를 아내는 힐끔 했다.
 
 또렷하진 않았지만 낯설지 않았던 윤곽, 설마...  
부랴부랴 두툼한 교인 사진 주소록 속의 네 팀이나 되는 성가대원들의 사진과 이름을 한 사람씩 살펴본다.


 그래, 그녀 같은데 !
라스트 네임이 틀리지만 어쩌면 그녀 일지도 모르겠다.
어렴풋한 기억 속의 잔영 뒤로 세월을 머금은 모습이 확실치는 않지만, 변한 모습으로 그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우연에 한 순간 멍해진다.  
생소한 성씨는 아내와는 달리 이곳 사람들처럼 남편의 성씨를 따랐을수도 있지 않은가 ?


 
 복학 후 학교 후문 근처에서 하숙을 했었는데,
주인 아저씨 내외는 학생들을 상대로 조그마한 편의점을 운영하며 하숙도 함께하고 있었고,
이북에서 월남한 분들답게 무척 근면한 분들로 네 딸에 아들 하나의 평범한 가정이었다.


 큰 딸은 결혼하여 중학교 선생님이었고,
둘째 딸인 성가대의 그녀 (확실치는 않지만 그렇게 생각된다) 는 대학병원의 새내기 간호원.
셋째인 고등학생 아들은 공부엔 아예 취미가 없어 아버지 가게를 물려받아 운영하는 것이 희망이라고 해서 아저씨 속을 무던히 썩였다.
중학생인 넷째 딸은 귀엽기는 했지만, 하숙생들의 기피대상 이었는데, 
이 녀석이 하숙생들을 쫓아다니며 영어, 수학 등 과목별로 개인교사 삼아 질문을 하곤 해서 꼼짝없이 몇 시간을 붙잡힌
친구들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 넷째가 나를 조금 따랐다. 
학교 선생님들은 집합, 부분집합, 충분집합 등 교과 과정대로 판에 박은 듯 가르치지만,
집합론의 역사라든지,
Set theory, Paradoxes in native set theory axiom systems .. (대학 교양수학에 그냥 있는 내용이다)
이런 식의 영어 몇 마디 대충 섞어서 썰을 풀기도 하니 이 녀석이 그만 나의 팬이 되어버린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호칭이 하숙집의 둘째 사위로 변했다.
가끔 아주머니께서 야식을 손수 챙겨 내방을 직접 찾아주셨고,
가게 문을 닫고 밤늦게 귀가한 아저씨는 늦도록 책상에 앉았던 나를 불러내려 가끔 대작을 하기도 했었는데, 
이런 일이 다른 친구들 눈에는 조금 달라 보였는지 농삼아 시작된 것이 나중엔 자연스럽게 둘째 사위로 불리게 된 이유다. 
어쩌면 그런 상황을 은근히 즐겼던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내가 군계일학처럼 돋보였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차라리 여느 친구들보다 적은 체구와 붙임성은 더더구나 없는 평범하기만 했었는데, 
하숙비 밀리지 않는 축에 속했고 여느 하숙집에서나 인기 없는 대식가가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
 
 어느 화창한 휴일, 
하숙방 대청소를 하고 눅눅해진 요와 이불을 햇볕에 소독하기 위해 옥상으로 올랐다.
그 당시 보편적인 단독주택 옥상에는 붉은 벽돌 굴뚝과 그 맞은편의 철주 사이로 빨랫줄이 처져 있었는데,
묵직한 침구를 빨랫줄에 척 펼치는 순간,
그만 굴뚝이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던져올린 침구의 충격을 견뎌내지 못했던 것이다. 
온 집이 흔들리고 하숙생 모두 놀라 뛰쳐나오는 소동이 벌어졌고,
점심 식사중인 주인아저씨도 뛰어 올라와서는..
그 망연함이라니.
벌게진 얼굴로 어쩔줄 몰라 하는 나를 두고 하숙생 친구들은 둘째 사위가 처갓집 무너뜨린다고 박장대소했다.
 
 아저씨와 함께 저녁 늦게까지 벽돌에 붙어있는 시멘트 부스러기들을 하나씩 망치로 떼어내고 
시멘트를 반죽하여 가까스로 굴뚝을 보수했다.
집에 무리라도 생겼을까 송구스러워하는 나에게,


    “사내놈이 간나새끼처럼 좀스럽기는, 집 무너지지 않아. 
      나중에 삼 층 올리려고 이 집 지을 때 철근 넉넉히 넣었으니 걱정하지 마”  하고는 껄껄 웃으셨다. 
 
 그런데 정작 그녀와는 결단코 손목 한번 잡아본 적이 없었으니. 
어쩌다 마주칠 땐 멋쩍어 씩 웃어 보이면 사정없이 째려보며 도끼눈을 하곤 했다.

(어이쿠 ! 이 가시나 성깔 하고는, 야 걱정마,  내가 미쳤다고 이 집 사위가 되냐.. )
빨랫줄에 걸어 놓았던 그녀의 간호원 가운이 굴뚝 무너질 때 깔려서 조금 찢어졌었는데, 
그 성깔에 어쩐 일인지 꿰매서 줄곧 입고 다니기는 했었다.
 
 더위가 막 시작된 초여름의 어느 날.
아주머니께서 과일 한 접시를 들고 방으로 불쑥 들어오시더니,
둘째 딸이 사우디아라비아로 간다면서 내 눈치를 한번 쓱 살피고는 혀를 끌끌 차며 내려가셨다.
따님이 간호원 송출 프로그램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가는 것이 못 마땅한 것인지, 
아무런 내색 없는 내 꼴이 마땅찮은 것인지 내심 당혹스러웠다.
 
 생맥줏집에서 마주 앉은 그녀는 평소답지 않게 조곤조곤 이야기를 했다.
같은 병원의 선배 언니 두 명도 같이 가기로 했고 ...
일 년 지난 후 재계약보다는 미국이나 캐나다 쪽으로 갈 생각이고 ...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이 아이는 왜 이렇게 말을 흐리는 것일까 ?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언가 빠져 나가는 듯한 이 얄궂음은. 
시선을 고정하며 공부를 계속할 것인지 취업을 할 것인가를 묻는 두 눈은 왜 새삼 이토록 깊어 보이는가 ?
그녀는 내년 유월이 휴가라고 했다.
 
 며칠 후 그 여름의 중간,
둘째 사위가 공항 환송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시덥잖은 하숙생들의 농을 뒤로하고 그녀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났고,
공부보다는 취업을 택했던 나 역시, 그해 12월 졸업 전의 조기취직을 하고 하숙집을 떠났었다.
 
    “ 자네,  OO 이 하고 별다른 이야기 없었는가 ? “
    “ 네, 별다른 이야기는 ..  좋은 경험 하라고...”
    “ 그래, 내년 6월에 휴가차 들어 온다고 하니, 다시 안 보내고 싶은 생각인데,
      그때 자네도 집에 오도록 하게. 그리고 거처가 확정되면 지체없이 연락 하도록 하게, 알겠는가 ? ”


 
     “ 오빠, 이 편지 나중에 읽어 봐 “  넷째가 대문간에서 쪽지 하나를 툭 건네고선 쪼르르 뛰어 들어갔다.
 
        ((   오빠땜에 나 수학점수 엄청 올랐거든,
              내년 6월에 작은언니 휴가래      ))


 끝에는 혀를 쏙 내미는 제 얼굴을 그려놓았다. 
하하하 그래, 너 때문에라도 6월엔 꼭 들려야겠구나.

 
 취직을 하자마자 회사는 무척 바빴다.
미도파 옆 본사건물 몇 개 층의 전산센터가 협소하여 24시간 온라인으로 운영 중인 시스팀을 
최소한의 시간에 여의도의 신축 전산센터로 옮겨야 하는 프로젝트였다.
오랜 준비과정과 D-Day 였던 6월에는 기술담당 우리 팀은 합숙까지 하며 매달려야 했고.
프로젝트 실패는 회사의 전 업무가 마비되는 상황,
합숙이란 팀원들의 사생활을 담보로 하는 것.
내 인생에서 그해 6월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흘러갔고,
그녀도 나의 기억에서 지워져 갔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 가까이 지척에 있는것 같다. 

설마 .. 우연히 조금 닮아 보이는 것일까 ?       (Jan. 2013)
 
 
     ((    Non-fiction입니다.

           단지 그녀가 ‘英子’라는 흔한 이름은 아니며 여리고 순수했던 젊은 날의 추억일 뿐입니다.         
           저는 지금의 제 아내를 사랑합니다. 
           대단치는 않지만, 아내와 같이 일구고 가꾸며 함께 한 시간이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지난 했을지라도,
           저에게는 정녕 가치 있고 값진 삶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바램은, 
           세월의 겹과 고단함이 그녀를 비켜 갔었기를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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