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남세스러운 일을 겪곤 종일 우세스럽다는 생각에 은근히 부아가 치솟는다.
만사 제쳐놓고 이제라도 공부를 좀 해야 할지 이래서야 사람 꼴이 아니다.
" 너 차이니즈냐 ? "
" 아니야 임마, 그런데 그건 왜 물어..? "
개인적인 백그라운드를 물어서라기 보다는 차이니즈라는 말에 그만 심사가 뒤틀린다.
펑퍼짐한 얼굴만 보면 전부 중국인이라 생각하는 아둔한 이들의 몽매함이 측은키도 하려니와,
이럴 때마다 당연히 불쾌해지게 마련.
한껏 째려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개의치 않고 빙긋 웃으며 카운터 옆에 밀쳐놓은 책자를 가리키는 사내,
오십 중반쯤 되었을까, 그런대로 말쑥하게는 생겼다.
여인네들이 나이 들면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 동색이란 말처럼 요즈음 부쩍 그 참견이라는 것이 심했다.
허구한 날 노트북 끼고 앉아 쓰잘데 없는 웹서핑에 정신줄 놓아버린 미숙한 영혼이라는 심한 말에 조금 충격을 받고는 불끈했지만,
오늘만큼은 어머니날이니 삭여야 한다.
지하실에 널려있던 책 중에서 집히는 데로 한 권을 집어 왔었다.
널렸다고 하니 대단한 장서인 양 하지만,
몇 번의 이사와 아내의 깔끔함 탓에 구질구질해 보이는 오래된 책들이 남아있을 리 없으니,
사실은 정리라고 할 것도 없는 내 빈약한 책장 속에서 용케도 찾아낸 오래된 책자가 우연찮게 오늘 사달을 내고 말았다.
누렇게 변한 지질에 활자체도 눈에선 1975년도 인쇄판,
1,300원이라는 정가 표시는 더욱 생경하다.
선덕여왕이 당태종에게 연애편지를 썼다던가,
관음보살의 유혹을 이겨낸 노힐부득, 달달박박이 미륵 존상이 되었다는 부류의 불교의 이적에 초점을 둔 일연스님의 역사 서술서 삼국유사.
오래된 책자를 새삼 공부하겠다는 것보다는 아내의 입막음을 위함이다.
‘ 有興輪寺僧眞慈 每就堂主彌勸像前 發原.......
흥륜사 중 자진이라는 사람이 있어 항상 그 법당 주인인 미륵상 앞에 나아가 발원…… ‘
잠깐 보여줄 수 있느냐고 하더니, 주석으로 달린 한글은 제외하고 한문으로 된 본문을 줄줄이 읽어 제친다.
아니, 나는 한글 주석을 먼저 읽고 그다음 한자로 된 본문을 대충 짐작해가며 읽는데.
뜨악하다.
비교종교학을 가르친다며 한자, 힌디 글을 공부했다고 한다.
코리안들은 글자가 없느냐는 바보 같은 질문도 덧붙였다.
" 야 임마, 위의 것은 중국 놈들 한자이고, 밀에 것이 코리안의 한글이야 "
손가락으로 짚어 보였더니, 왜 코리안의 역사가 중국 글자로 쓰여 있느냐고 한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이 남의 속에 불을 붙이네,
오래전 동아시아에서는 한자가 국제어야, 일본 녀석들도 오래전에는 걔들 역사를 한자로 썼어.
어쩌고 얼렁뚱땅 했지만,
흥미 있는 책이라며 제목을 적어가는 녀석을 보낸 후,
영 개운치가 않고 찜찜하다. 별스러운 일도 당한다.
사실은,
그들에게 알기 쉽고 흥미 있게 풀어 설명해줄 수 없었던 내 인문학적 소양의 무지가 더 찜찜해서일 것이다.
그래, 차분히 공부 좀 해보자.
‘ 바람 風, 계집 女, 서로 相 .. ‘
이래서야 어디 언제쯤 사서오경을 독파할 수 있을까. 不知何歲月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