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답지 않은 부드러운 날씨다.
아침부터 흐리더니 잠깐 갠 하늘,
살짝 내보이는 햇살의 감미로움에 이끌려 가만히 현관을 나선다.
금빛 가루가 머리 위로 그리고 어깨 너머로 내려앉으며 사방에서 춤을 춘다.
그새 조금 내비친 햇볕이 부슬비를 이같이 금빛 가루로 만들었나 보다.
반짝거리며 흩날리어 조금은 날카롭게 보이기도 하지만,
눈길 가는 곳 마다 황금색으로 물들여져 찬란하다.
지금의 절기로는 이례적인 푸근하고 부드러운 날씨가 고맙기도 한데,
더불어 어쩌면 이렇게 황홀한 자태까지 만들어 낼까.
모처럼의 휴일에 맞는 진기한 광경에 어느덧 쌀쌀한 바람도 잊은 체
편안해진 마음에 이 아침이 더욱 아름답다.
아내가 김장준비를 하겠다며 딸아이와 함께 아침 일찍 한인 마켓이 있는 대도시로 갔다.
김치 담그기를 여러 해 동안 잊고 지냈는데,
새삼스럽게 올해 들어 김장을 하겠다고 했다.
깜빡하고 아내 자동차의 엔진오일을 미처 교환하지 못했다고 했더니,
낡기도 하고 덩치만 큰 내 차가 싫으니 딸아이 차를 이용하겠다며 딸아이와 함께 갔는데.
걱정이다.
저녁에 기온이 떨어지면 길이 미끄러워 질텐데.
이즈음에는 모르는 사이에 살아가는 모습이 조금씩 변하는 것 같다.
한인들이 뜸한 곳에서 이십여 년 가까이 살아온 이유도 있지만,
소심해져 작은 일에 종일 걱정을 하기도 하고,
사랑방의 하릴없는 늙은이처럼 혼자 구시렁대기도 하니,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는 탓인가.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자연스레 변해가는 일이 누적되어 새로운 습관이 되고,
그래서 또 다른 삶의 방식으로 자리할 테니 그렇게 탓할 일은 아니지만,
문득,
아주 가끔은,
놓치지 말아야 할 소중한 무엇을 잃어버리고,
또한 놓아 버린 것을 깨닫지도 못한 채 스쳐 가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뒤돌아 보게 될 때가 있다.
입고, 먹고, 기거한다는 의식주의 기본적인 삶의 형태에서도 그러한 느낌을 종종 갖게 된다.
양복 입을 일이 없는 일상에서 어쩌다 입게 된 정장한 나의 모습을 보고 놀란 듯,
" 어머나, 본래의 당신 모습으로 되돌아 왔네 "
라는 아내의 말이 쓸쓸하게 들리는 경우에도 그렇게 느끼게 되고,
따끈한 온돌방의 딱딱하지만, 감칠맛에 길든 발바닥이,
푹신 거리는 카펫의 감촉을 한동안, 그리고 오랫동안 쉬 받아들이질 못했는데,
무심결에 카펫의 감촉이 나의 일상이라는 생각을 할 경우에도 그런 느낌을 갖게 된다.
특히 먹는 것에서의 느낌은 더욱 그러하다.
아내는 꽤 완벽한 사람이다.
음식을 할 때는 그런 경향이 특히 두드러져 보이는데,
한두 가지 음식을 할 경우라도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린다.
완벽하기보다는 손놀림이 늦는다는 말이 맞는 표현일 테지만.
그러니,
아내에게 김치 담그는 일은 사뭇 큰일이다.
종일 걸려서 겨우 두서너 포기의 김치 담그는 일에 진을 뺀다.
그래서 바쁜 일상에 재료를 구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고,
온종일 애를 쓰는 탓에 김치 담그는 것을 그만두게 된 것이 벌써 여러 해,
그렇게 자연스럽게 오랫동안 식탁에서 멀어진 김치를,
올겨울에는 새삼스럽게 김장을 하겠다며 재료 구입차 대도시로 갔다.
산다는 것이,
뭘 그렇게 특별한 의미나 고매한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닐 텐데,
여태 무얼 하느라.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얻겠다며,
김치하나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이렇게 변한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소중하고 귀한 것이 송두리째 빠져서 멀어져 가는지도 모른 채.
차츰 기온이 떨어진다.
길이 미끄러워 질 텐데.
별 탈 없이 돌아왔으면 좋으련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