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모르는 듯 아는 듯

단풍들것네 2017. 7. 28. 10:45

한낮의 볕이 곡식 영글기에는 안성맞춤이지만,
초가을 따가운 볕은 용심 많은 시어미가 신나는 계절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사시사철 발 벗은 며느리는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는 바깥 들일로 내쫓겨야 하는 계절이니
정지용 시인의 모친은 꽤 심술 맞은 시어머니였을 것이다.


아직 한낮의 별이 따가운데,
근심 많은 아내는 벌써 겨울이 걱정이다.

집 손 봐야 할 곳을 꼽아 보이는 열 손가락이 부족하니,
이순의 눈썰미가 과하기도 하지.


그렇다고 마냥 아내의 근심을 탓할 일은 아니다.

두어 해 모자라는 이십년에 낡기는 했다.
세월의 무게라는 것이 어디 물건이나 집이라고 비켜 가질까.
바래고 낡아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초가을 뙤약별에 일 벌여 놓은 지가 벌써 며칠째.
용케 알고는 커피 한 잔 들고 찾아왔던 ㅂ 씨,
새까맣게 변한 내 모습에 서둘러 자리를 뜨고 픈지

      " 수고 하이소오 " 

건네는 인사말이 급하다.
어수룩한 사람,
설마 눈처럼 뽀얀 바지에 시멘트 자국 묻히게 할까.


       " 하이 준, 너무 심하게 일하지 마 "
       " 그래, 고마워 "

대학에서 비올라를 가르친다는 옆집 노처녀,
어쩐 일인지 인사를 했겠다.
아이들 어렸을 때 집 밖으로 몇 가지 악기 소리 나는 것을 관심 있어 하더니 
이후 아내하고 아는 체를 하는 사이지만,
나하고는 전혀 아니다.
되려 똥 밟은 양 한다.

노처녀가 심심찮게 밤늦도록 파티를 자주 벌였던 게 화근이었다.
어느 퇴근길의 늦은 밤.
옆집 방문객들이 내집 드라이브 웨이 진입로를 가득 메워 파킹하는데 애를 썼다. 
몰상식한 인간들이라고 된 소리를 한 이후론 마주치면 서로 똥 밟은양 했다.
그 노처녀가,
너무 심하게 일하지 않느냐고 했고
ㅂ 씨는,
혼자 고생하라고 했다.
 
그 참 고약한 우리 인사법이다.


부시도록 억센 햇살이 불편하다.
폴 고갱은,
따갑고 강렬한 햇볕만큼 돋보이는 선명한 색채의 화풍으로 전설적인 화가가 되었다지만,
나에게는,
선명해서 눈에 부시고 빈틈없이 쏟아져 내리는 이 한낮의 밝음이 차라리 거슬릴 뿐이다.

벗어놓은 선글라스를 그만 깔고 앉아 못쓰게 되었으니,
우짜몬 좋노?
검안하기 위해 예약하고,
도수 맞추고,
며칠을 기다려 맞춤하는 일이 번거롭고 성가시기도 하지만,
일 벌여놓은 뒤라 시간 내기가 수월찮다.
임시로 허름한 놈을 그냥 집어왔더니,
햇볕은 가려주지만 초점이 흐려 허우적거리니,
일에 능률이 오르지 않아 고생했고,
곱으로 미련코 게으르다는 핀잔도 듣다.

굼뜨고 서툰 솜씨로 힘들게 마무리를 하고 보니,
산발에 볕에 그슬린 볼품없는 모습은 십년은 족히 나이를 더 들어 보이게 한다.

머리를 자르던 미스터 최의 중얼거림이 꿈결 같다.
꾸벅꾸벅 졸았나 보다.

     " 비즈니스는 어떤가요 ? "
     "  . . . . 네 ?  "

새까맣게 그을린 목덜미를 보고선,
여름내 골프장에 자주 나갔느냐고 연신 되물었겠다.

      " 어허, 그래요 ? "

자연스러울 만큼,
또 당연하게,
꼭 이렇게 꼬치꼬치 캐묻는다.
건강하게 보인다는 인사치레만 해도 좋으련만,
면구스러워 할성 싶어 건성으로 대꿀하긴 했다.

동양화에서는,
남겨놓은 빈자리를 여백의 미라 한다더니만.
미루어 짐작하고,
그래도 어렴풋 하걸들랑 나름대로 그려 넣고,
모르는 듯 아는듯 함이 좋으련만.

흠뻑 그리고 꽉 차지 않아 여유롭고,
흑백으로 옅게 물들어,
그래서 담백한 듯 넉넉한 수묵화를 생각한다.
흐린 듯 부드러운 수채화는 또 어떤가.
 
힘든 노역 끝이라,
새삼스럽게 구글 스트리트 뷰우로 집을 검색했다.
엉 !
이게 무슨 황당한 그림인가 ?
작년 가라지 도어 페인트 칠하던 때의 뒷모습이 여러 각도로 찍혀있다.
그만 홀랑 벗겨진 듯한 당혹감.




묘한 기분이다.
정면을 비추지는 않았으니 초상권 침해는 아니지만,
빌어먹을 놈들.
꼭 이렇게 내 사는 모양을 한치 빈틈없이 세세히 까발려야 할까.

이전에는.
한치 빈틈없이 딱딱 들어 맞는 것만 예스,
거르면 당연히 노오.
 
콤마와 도트는 엄연히 달랐고,
센티미터보다는 밀리미터가 정확했고,
와이셔츠는 눈같이 희어야 했고
뿌연 안개와 으스름한 저녁보다는 활짝갠 대낮이 윗길이었지.

 
조금은 옅고,
없는 듯 모자란 듯,
모르는 듯 아는듯 ...

얼핏 설핏 보일듯 말듯하여,
한편으론 애잔스럽기도 한 어스름함을 생각한다.      (Sep.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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