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을 정성스럽게 다듬어
평소에는 무심코 버렸을 누런 포장지에 이 글을 쓰며
반세기가 훨씬 지나
이제는 흐릿해진,
이면지를 차곡차곡 쌓아만든 공책 위로
연필을 꼭꼭 눌러가며 공부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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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 17 / 13 ..
. 하지는 낮의 길이, 동지는 밤의 길이 ..
. 바람 風, 사람 人, 계집 女 ..
. 한글은 세종대왕, 훈민정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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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거리는 손재봉 틀
어머니의 바느질 소리는 자장가인 듯 포근하고,
아버지의 궐련 연기는 매웁고도 고소한데
가물거려 흐릿한 조그마한 백열전구 하나..
내 졸음 겨운 손아귀 에선 몽당연필이 데구루루..
재봉틀로 조각조각 잇대어 만든 이불 속에서
육 남매의 겨울은 깊어,
궐련 한 개비를 반으로 뭉툭 잘라 빨뿌리에 끼워 피우던,
손마디에 담배 진이 물든 아버지의 절약에,
우린 길고 긴 겨울이 따뜻했다.
누런 이면지 종이 공책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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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 17 / 13 ..
. 하지는 낮의 길이, 동지는 밤의 길이 ..
. 바람 風, 사람 人, 계집 女 ..
. 한글은 세종대왕, 훈민정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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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꼭 눌러쓴
연필 글씨가 끊임없이 새겨지고
똘망똘망(?) 하게 생긴 어린 단풍들것네의 작은 집엔
온 삼동 내내
따뜻한 겨울밤이 깊다..
배달된 물건을 열어보니
속에 파손 방지용으로 누런 종이가 많이 들어있다.
새삼 자원 낭비가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누런 종이를 펼쳐서 반듯하게 접었더니 깨끗하여 쓸만하다.
불현듯 옛 생각이 떠올라
내친김에 나머지 종이도 반듯하게 접었다.
이 하찮은 종이를 어디에다 쓸 수 있을까?
연필을 찾아서 정성스럽게 깎아들고
누런 포장지 종이 위에 이 글을 쓴다.
왠지 훈훈하고 따뜻해지는 마음에
사진도 한 장 남기고,
소중한 옛 추억에
좀스럽고 쪼잔해 보일망정 오늘 저녁이 흐뭇하다,
자원낭비
요즈음 너무 심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