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하나를 떠올리면 , 또 하나를 지우고

단풍들것네 2019. 6. 18. 00:44

며칠째 흐린 날씨,

아침부터 내린 안개비의 습기가 거슬려 야외로 나서다.


꿉꿉함이 서린 들녘은

맑은 날 생기 돋는 대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트랙터가 흙을 갈아 엎어놓은 들판에

안개비에 섞인 찌릿한 냄새가 자욱하다.


   웬 냄새가 이렇게 고약한가?


가장자리에 내려서 꼼꼼하게 살펴보니

두엄이라기 보다는 인분 같은 독한 냄새가 심하게 난다.




이곳을 흐르는 강 주위의 땅이 오염되었다는 뉴스가 있긴 했었는데,

그런 이유로 비료 대신 퇴비를 뿌렸을까?


갈아엎어 놓은 흙 위로 축축한 물기만 번져 퇴비의 흔적을 볼 수 없으니

그렇지,

이 광활한 들판에 인분을 뿌리지는 않았을 테고,


   어쩐 일인가..


어쩌면 두엄이나 퇴비 냄새가 나는 비료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맘때쯤,

어린 시절 고향의 들판에서는 

콧속으로 훅 스며드는 찌릿하고 역한 

이런 냄새가 풍겼다.


그리고,

꿉꿉하고 흐린

이런 날에는 숭어가 잘 잡힌다고 했다.


어른들은 작은 개울물이 합쳐지는 바다 언저리에서 투망질을 했고

은빛의 싱싱한 숭어를 잡아 올렸지.


물씬물씬 숨이 턱턱 막히게 풍기던 두엄 내음..

펄떡거려 더 푸러렀던 은빛의 물고기..


옷 속으로 파고들고 

머리칼 속으로 스며들어

움직일 때마다 풍기는,


꿉꿉한 날이라

더욱 찌릿하고 역했던 내음이지만, 


큰 숨을 들이키며 한동안 머무르다.


되돌아갈 수 없는 아련한 옛 생각은 

돌이켜 다시 볼 수 있게 차곡차곡 새겨두어야 할 보석이다.




앞뜰의 라일락을 파내었다.

며칠을 망설이고 뜸을 들였는데..


오래전 집을 지을 때 심었던 라일락이 제법 큰 나무로 성장하여 

매해 이맘때면 그윽한 향과

젊은 날의 소중한 추억에 젓어들게 하던 아끼던 나무,


작년에 시들시들하더니 결국 올해는 전부 시들어 말라버려 

어쩔 수 없이 앙상한 가지를 잘라내고

마지막으로 뿌리까지 파내고 보니,

아련한 추억 한자락이 꺾여 나가는 아픔이다.




라일락의 향기는,

너무 진한 듯해서 한 걸음 옮기면 그윽한 듯도 하고,

어쩌면 싸한 느낌으로 다가오던 라일락 향기는,

나의 이종 누이를 떠올리게 했었다.


이제는 오래전의 모습만 생각나는 그 아이는, 

제집 뜰에 핀 라일락의 향기를 푸른 기운이 도는 쌉쌀한 느낌이 든다고 했었지..


  ( 淑 이라는 제목으로 가여운 누이의 이야기를 이전에 올린 적이 있다 )



아내는,

하릴없는 사람처럼

축축하고 꿉꿉한 날에 

온몸에 웬 고약한 냄새를 묻히고 다니냐고 할 테지만,


아련한 유년의 기억을 보물처럼 살포시 꺼내어 보기도 했고,

되돌릴 수 없는 젊은 날의 시린 추억은,

이제는 다시 꺼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날이다.


이젠 추억을 하나 떠올리면 

또 하나의 추억을 지워야 하는 그런 나이인가?


오늘 아버지 날이라고 하는데

어째 많이 허전하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술집작부 백화  (0) 2019.06.29
황당한 여인  (0) 2019.06.19
실망스러운 모습  (0) 2019.06.03
욕하지 마세요  (0) 2019.05.19
햇볕 드는 날이 좋지  (0) 2019.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