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낯설었던 하루

단풍들것네 2019. 3. 15. 07:12

서너 시간 장거리 운전끝에 찾은 영사관.


넓지 않은 주차장에 빈틈이 없다.

주변 이면 도로에 1시간 무료주차가 가능하다는 깨알 같은 글씨의 안내 표시.


주변 도로를 몇 차례 빙빙돌며 기웃거리고 겨우 주차를 했다.

눈과 빙판길에서 빈자리를 찾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텐데, 

민원인들의 불편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인가.


남의 나라 도심 한복판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를 마주하고 뭉클했던 마음이 그만 푸석푸석해진다. 




한자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기입하라는 서류 신청서 양식을 받아들고는

얼버무리게 되어 귀불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한자 이름을 써넣는 것도 낯설었지만

예상치 못한 주민등록번호라는 말이 당혹스러워 허둥 된다. 


마침 필요할 것이라 생각되는 서류를 모두 챙겨서 준비했기에

오래된 구 여권 속에서 주민등록번호를 찾을 수 있었고,

도장 찍는 공란에는 사인도 가능하다는 말에 

이곳의 연금 신청을 위해 필요하다는 한국의 서류 신청서를 작성했다.



영사관을 나설 때까지, 

혼란스럽고 허전하고 씁스럼키도 하고 

어쩌면 애잔하기까지 해서 허허로웠던 

이 묵직함은 도대체 어떤 연유인가?



손에 익지 않았던 아내의 자동차를 가지고 왔기 때문일까,

매해 갈수록 망설여지는 고속도로에서의 장거리 운전 탓일까,

단순한 반복 업무의 종사자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창구 직원의 무성의한 불친절 때문일까,

좁은 주차장에서 느꼈던 영사관의 무신경이 불편했기 때문인가?


.


꼭 집어 내 보일 수 있는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몇 달 동안 미적거리며 미루었던 연금 신청 서류작성은 세월을 거슬러 보겠다는 욕심이었는지 모르겠다.



주민등록번호를 찾기 위해 펼쳐 보았던 구 여권속의 젊은 나의 모습이 몹시 낯설게 보여

그만 울컥해진 심사가 

영사관을 나설 때까지 내내 허전하고 또한 묵직해져 심산한 하루다.


                        


아랫글은 몇 달 전에 연금 신청 이야기를 듣고 심란해 하던 아내에게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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