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죽고, 난 살고
두어 주일 따뜻해서 부드러웠던 날씨가 갑자기 바뀌어 한여름같이 후덥지근하다.
지난 겨울은 진이 빠질 만큼 길고 사나워,
모질기도 한 폭설과 추위라며 불평을 달고 지냈으니,
더운 날씨 탓하는 변덕이 어쩌면 경망스러운데,
그래도 후덥지근한 날씨는 계절을 건너뛴 것 같아 아쉽다.
모두 걱정하는 온난화 현상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말쯤에는 봄 기온을 되찾게 된다니 다행이다.
날씨가 풀리면 아내가 바빠지는 시간이다.
긴 겨울을 견디기가 쉽지 않았던 터라,
기다림에 지친 조바심은 겨울 끝자락의 언 땅을 힘들게 파는 수고를 마다치 않더니,
이즈음에는 늦은 저녁까지 앞 뒤뜰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잔가지 치기나 멀치를 보충하는 것은
겨우내 방치되었던 뜰을 정리하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잘 자란 화초나 정원수를 옮겨심고,
무거운 정원석을 직접 깔기도 하고,
멀쩡한 잔디를 뒤엎어 자갈밭으로 바꾸어 버리는,
기실 여인네들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노동 같은 이런 고된 노역을 매해 봄철마다 반복한 지가,
집을 짓고부터 시작되었으니 거의 이십 년쯤 되었다.
종일 앞 뒤뜰에서 까맣게 그을린 아내의 모습이 마음써여 조금 손을 보태 보려 할라치면,
손사래 치며 반기질 않는다.
뙤약볕에 땀 흘리는 것을 싫어하는 게으름과,
눈썰미 없이 서두르기만 하는 거칠고 무딘 손놀림이 못마땅해서 그럴 테지만,
실은 나의 무딘 감성과 무성의를 탓하는 것일 게다.
우리말로 수국 또는 불두화라고 하는,
스노우볼의 꽃망울이 벌레 탓에 건강치 않다며 요 며칠 아내는 마음을 많이 썼다.
풍토와 기후 차이 탓인지 우리의 수국꽃과는 모양과 질감이 조금 다른듯 하지만,
이맘때면 하얀 꽃잎을 꽃비인 양 흩뿌리는,
수다스럽지 않은 흰 꽃잎에 담백한 향기가 어우르지는,
아내가 신경 쓰며 아끼는 꽃나무다.
작년에는 진딧물 같은 벌레들이 들끓더니 한그루가 고사하여 솎아 내었는데,
솎아낸 빈자리가 횅하여 아내는 한철 내 아쉬워 했었다.
그런데 올해도 네그루 모두 꽃망울이 탐스럽지 못하고 벌레들이 들끓는다.
무더운 날씨지만,
주말부터는 기온이 떨어지고 비가 온다고 하니 오늘 살충제를 뿌려야겠다.
몇 년 전 부터 가정집 정원에 맹독성 살충제 사용을 금한다는 조례를 시에서 결정했다.
따라서 살충제 판매도 금지되었고, 살충제 살포 또한 당연히 위법.
"살충제 못 뿌리게 한게 벌써 몇 년 전의 일일텐데….
아직도 버젓이 살충제 파는 곳이 있는 모양이네…. "
이웃의 눈치도 보이고,
찜찜하고 썩 내키질 않아 몇 마디 덧붙였다.
" 그럼 살충제 대신 맨손으로 진딧물과 저 벌레들을 몽땅 잡아보슈 "
어쩔 수 없는 일,
사용 설명서를 보니 원액 20cc 에 물 6L,
위험이라는 경고도 붙어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맹독성이니 조심하라는 말이 테니,
몸에 튀지 않게 조심하며 플라스틱 살충기에 희석한 살충제를 가득 담아
사다리에 올라 듬뿍 살포했다.
겨울자켓을 입고,
모자를 눌러 쓰고,
눈 보호용 선글라스도 챙기고,
가리개로 코, 입도 틀어막은 완전무장을 한 체...
너희는 죽고,
나는 살겠다며.
힘든 작업 끝,
나부끼며 사르륵 그리는 나뭇잎 소리가 싱그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