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고파요
이른 아침,
반바지 차림으로 조깅을 하는 아가씨가 상기된 얼굴로 지나간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앞질러가는 탄탄한 종아리가 발자국마다 풋풋한 건강함을 남겨놓고 갔다.
긴바지와 칙칙한 상의에 운전석의 열선까지 켜고 않은 모습을 내려보다 슬며시 좌석 열선 스위치를 끈다.
계절이 바뀌었다.
매해 갈수록 더 할걸 허투루 듣기만 한다던 염려를 들을 만큼 유달리 겨우내 손등까지 터져
이번 겨울 나기가 쉽지 않았다.
때가 되면 물러갈 추위였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맞이한 이 봄이 그래서 더욱 고맙다.
아직은 조석으로 집안의 히터를 틀어야 하지만 도로엔 컨버터블과 모터사이클이 눈에 띄게 늘어
계절의 변화를 도로에서 먼저 확인하는 셈이다.
벌써 네거리의 신호등이 몇번째 바뀌었다.
이곳저곳 성한데 없이 파헤쳐놓은 도로에 차들이 좀체 움직이질 못하는 사이로 젊은 녀석이
'배가 고파요. 그런데 나는 돈이 없어요'
라는 피켓을 들고 서성이지만, 신호등에만 신경을 집중한다.
다행히 앞선 차가 서너 대뿐이니 다음 신호에서는 좌회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 가져요'
갑자기 차에서 내려 구걸하는 젊은이에게 맥도날드 종이봉투와 지폐를 건네는 아주머니.
그만 이번 좌회전 신호도 놓치고 말았다.
모두 고개를 내밀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으니 고함을 지를 수도 없는 일,
충만한 봄기운이 유독 저 아주머니에게만 듬뿍 안겼나 보다.
앞 뒤뜰엔 지난주부터 새싹들이 띄엄띄엄 고개를 내밀더니
요 며칠 사이 햇볕 드는쪽에서 화려하고 탐스러운 꽃잎의 빨강 튤립이 피웠고,
정원수 그늘 밑으론 하얀 수선화와 자줏빛이 어우러진 남색의 히아신스가 돋아났다.
그토록 매서운 계절을 견디고 알토란 같은 구근에서 하루가 다르게 싹을 틔우고
꽃대가 쑤욱쑤욱 올라 오는가 싶더니 요며칠 사이 제법 꽃망울 피운 것이다.
긴 줄기 끝에 달린 하이얗고 노란 수선화 꽃잎은 햇살이 부담스러울 만큼 가녀리게 곱고,
올망졸망 달린 히아신스의 꽃망울이 앙증맞아 손바닥을 내밀어 보다
언뜻 스치는 향기에 가만히 눈을 감는다.
연약한 자태와 아기자기한 꽃망울에서 겨우내 숨죽였던 자색(紫色)의 아픔이 남빛에 붉은 물 드리우듯
이렇게 싱그러운 봄내음을 뿌리고 있다.
부드럽고 따스한 아름다운 계절이다.
한 아름 이 계절을 맞이해야겠다.
쌉쌀한 봄나물에 한것 취해도 될것같고,
겨우내 제설용 소금으로 허옇게 변한 자동차에게 주인노릇도 해야겠다.
사업장의 카운터엔 박인수의 '봄비'를 틀어볼까.
아무래도 아내는 쇼팽의 스프링 왈츠가 낮다고 할테지만,
‘온갖 잡새가 날아드는’ 육자배기면 또 어떤가.
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