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켜 앉은자리
심한 독감이 내게 두 번이나 찾아와 가족들에게 까지 옮겨 덤으로 고생을 시켰으니, 올겨울은 몹시 길다. 독한 약을 서너 병이나 비웠는데도 좀체 차도가 없어 아내는 병원을 찾았고 내친김에 이런저런 검사를 몰아서 했다고 한다. 패밀리 닥터는, 당신 얼굴 본지가 오래 되었다며 나의 안부를 물었다는데, " 아이고, 창피하고 답답해라 " 의사가 뭐가 아쉬워 코빼기도 안 보이는 당신 같은 사람 걱정을 하다니, 이게 말이나 될 소리냐며, 제발 병원에 가라는 말을 겨우내 들었다. 쇠 심줄같이 질긴 심보, 무덤에 가서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아내의 핀잔을, 챙기는 배려로 여기기가 쉽지 않음은 이 겨울이 마냥 길어서 인가 ? 감기라 우습게 여겼다 간, 급성폐렴으로 번지면 큰일 난다는데. 모를 일이다, 무슨 연유인지 병원에 가는 건 정말 내키지 않다. 그리고 선 이곳저곳이 편치 않다며, 듣는 사람이 피곤할 끙끙 앓는 소리를 달고 지낸다. 어제는 또 눈이 내려 걱정을 했는데, 잠깐 햇빛이 보이길래 다행이라 여겼던 것도 이내, 변덕스러운 날씨는 곤두박질친 기온에 거칠게 바람까지 불어, 퇴근 녘에는 미쳐 소금을 뿌리지 못한 도로가 얼어붙어 유리 위를 운전하는 것 같아 식겁을 하고선, 아내가 심란해 할, 하지 말아야 할, " 허 참, 매해 갈수록 겨울나기가 쉽지 않네 " 라는 말을 기어코 하고야 말았다. 두 어달 전에 배달된 서류. 노령연금 신청을 위한 서류를 준비하라는 메일이다. 내키진 않지만, 마냥 미룰 수 없으니 큰맘 먹고선 차근차근 살펴본다. 이십 년여 년 전 최초 입국 당시의 스탬프가 찍힌 랜딩 퍼밋도 필요하다고 쓰여있다. 충분치 않은 금액치곤 서류작성이 까다로워, 빌어먹을 슬그머니 심사가 꼬이는데, 이젠, 짐짓 모른 체 하던 아내에게 이야길 그만 해야겠다. " 일 그만하고, 내년 부터는 이것 가지고 살아야 한다니 가능하겠소 ? " 혹 모르니, 내게 무슨 일 생기면 홀로된 배우자에게도 수당이 있다고 꾹꾹 잊지 않게 이야기를 했다. " 어머나, 과부 수당이란 말이네 " 깔깔 재밌게 웃던 아내. 잠깐 눈빛이 흔들리는 듯하더니 슬그머니 화장실로 사라졌다. 오늘, 노령연금을 위한 서류를 준비한다는 말이 뭘 그렇게 서운할 일일까 . 언제나 쇠 심줄 같이 그 자리에 있을 사람이라 여겼음이리라.
깃털에 목을 묻은 채 덱 위에 웅크린 작은 새 한 쌍. 차가운 날씨 탓인지 미동도 하지 않더니 이젠 서로 목을 비비고 있다. 개울 바로 뒤편의 아늑한 숲을 두고선, 무슨 까닭으로, 덱 위에서 찬바람을 온몸으로 저렇게 받아내고 있을까 라는 걱정은, 갑자기 부는 바람에 우수수 날리는 깃털이 위태로워 보여서다. 사진을 담아보려 창문을 살며시 열어본다. 놀라지는 않은 듯 우두커니 올려보나 싶더니,
어허, 그 녀석들 민망하게 짧은 짝짓기를 하더니 푸르르 날아갔고, 덱 위에는 아내가 싫어하는 배설물을 잔뜩 뿌려놓았다. 긴 계절이 물러가고 있다. 나의 시간도 조금씩 비켜 가는 것인가 ! 그래, 너희는 계절 따라 알을 품고, 그래서 새 생명을 키울 테지. 내 집 뒤뜰엔 갓 부화한 어린 새끼들을 이내 몰고 올 것이고. 부인, 나의 아내여. 그렇게 마냥 서운해 하지 마시요. 조금 비켜 앉는다고 난 그렇게 나쁠 것 같진 않구려 ... 다가올 봄엔, 우리가 조금 비켜서 물러나 앉은자리, 우리집 뒤뜰엔 갓 부화한 어린 생명들이 가득 할 것 같지 않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