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보자
창문 사이에 민들레가 끼어 있다.
줄기가 달린 걸 보니 바람결에 묻혀온 것은 아닌듯한데 어쩐 일일까.
후 불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만 같은,
어린 새의 깃털처럼 보드라워 보이는 씨앗을 들여다본다.
이 가녀린 녀석은 어디쯤에서 와서 내 집 창가에서 머무는 것인가.
작은 바람에도 멀리 날아갈 수 있을 만큼 솜털같이 가벼워진 씨앗이지만,
아직 푸른색을 머금은 기다란 줄기를 매달고 있으니,
놓아버리지 못한 긴 줄기의 안타까움이 버거워 잠깐 머물다
먼 여행을 준비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푸른색으로 뒤덮였던 들판이 어느새 색을 바꾸어 가고 있다.
끝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줄지어 선 옥수수밭에서 들리는,
미풍에도 바스락거리며 흔들리는 마른 소리.
잠깐 멈추고 귀 기울이면 어느새 가슴속으로
사각사각 스며드는 메마른 맑은소리.
낙엽색으로 물들어 영글어 가는 너른 들판의 풍요로움이 넉넉하고도 여유롭다.
매일 두어 번씩 주차하는 공터 앞의 목장에는
여름내 풍성한 초지에서 지낸 말들의 투레질이 힘차고
푸짐하게 살이 오른 엉덩이가 기름져 하늘은 깊고도 푸르러니,
옛사람들의 말이 그르질 않다.
계절이 깊어가고 있다.
혼자만의 저녁 식탁이 싱겁다.
이것저것 참견하기 좋아하는 아내는 저녁 뉴스가 별로인지 졸고 있으니
간단히 저녁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는 참에,
우연히 둘러본 덱 쪽의 창문에 반짝이는 동그란 것이 언뜻 보인다.
얼굴에 둥그스름한 흰 띠를 두른 것처럼 보이는 아메리카 너구리의 일종인 래쿤의 눈동자다.
내 저녁이 탐이 난 것인지,
한동안 안쪽을 들여다보던 두 녀석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는 듯한 거동과 덱까지 침범한 당돌함에 불쑥 화가나,
후다닥 쫓아가며 창문을 열었더니 졸던 아내가 놀라서 뒤쫓아 나왔다.
자두를 담아놓았던 봉지는 성한 곳 없이 찢어졌고 흐트러진 덱에는 자두의 씨만 어지럽다.
잼을 만들겠다며 많은 양을 준비했던 자두가 그만 수난을 당한 것이다.
아내는 무척 속상해했지만,
벌써 녀석들이 겨울 양식을 준비하는 셈이니,
내 집 뒤 덱에도 계절이 찾아왔다.
검은 구름을 잔뜩 몰고 오는 서풍이 거세어 여름 바람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차가운 기운에 절로 몸이 움츠려진다.
샛바람이 불면 비가 온다고 내 어릴 적 어머니는 말씀하셨는데...
저 바람 뒤에 비가 내리면 계절은 더욱 깊어갈 것이고
땅에 메이지 않는 새들은 긴 여행을 준비할 것이다.
쉼 없이 변하는 풍경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을까.
변하지 않은 영원한 것은 신에게 속한 시간이라지만
이 짧은 계절에 무엇을 갈무리 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었는지 자문해보기 위해서라도
이번 주말에는 길을 떠나 보아야겠다.
계절이 더욱 깊어 버리고 말면
만추의 여행은 너무 쓸쓸할 것 같지 않은가.
(Oct.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