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들것네 2017. 7. 12. 09:21

 뒤늦게 전해 들은 지인의 부음은 장지가 꽤 먼 곳이다.
연락을 받고서는 잠깐 망설였다.
주말이라 자리 비우기가 쉽지 않고 고인의 전력을 보아 조문객이 적지 않을 텐데 굳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실은 교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자잘한 한인 모임의 여러 직책이 당연직이었던 이곳저곳 빠짐없이 관심을 쏟던 분이었니,
모임(~會) 많은 사람들의 그 공력이 때로는 부담스러운 나와 같은 사람과는 데면스러웠을 것이 틀림없겠다.
서설이 길어져 조문이 늦을지 모르니 서둘러야겠다.
 
 가까스로 시간에 맞추어 도착한 곳의 주차장은 비어있고,
드넓은 공원묘지도 한적하여 사람들을 볼 수 없으니 늦은 것 같진 않은데 어쩐 일일까 ?
관리실에 들렀더니 세 시간 후에 일정이 잡혀있다.
아마 부음을 전했던 사람은 이곳의 영결 시간 대신 장례식장의 예배시간을 전한 것 같다.
매장지가 어디쯤이냐는 물음에 관리인은 뜨악한 표정이고 관리인의 대답에 나 또한 어리둥절하다.
火葬할 고객의 매장지를 찾는다는 것을 그는 의아해했고 그런 사실을 전해 듣지 못했던 나.
동문서답을 한 것이다.
매사 서둘기만 하는 푼수 없음에 그만 실소를 했다.
 
 대기실이 깔끔하기는 하지만 오래된 건물의 묘한 분위기에 밀려 그만 밖으로 나섰다.
여러 조문 중에 장지까지 찾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고,
일상을 벗어나 이렇게 한낮을 공원묘지 내에서 보내게 된 것도 일찍이 없었던 일.
한적한 곳에서 산책도 하며 여유롭게 기다려 보기로 하지만,
예기치 않게 묘역에서 갖게 된 별난 망중한은 어쩐지 씁쓰름하다.
 
 가장자리를 따라 조림된 숲은 번잡한 세사를 잊게 하려는 배려인 듯 자연스럽게 도심과 경계를 이루고,
오래된 곳에서 느낄 수 있는 세월의 예스러움이 낯선 객을 편안하게 한다.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안쪽은 평온한 아늑함으로 또 다른 세상.
드넓은 묘역엔 군데군데 덜 녹은 눈들이 쌓였지만, 새순을 피우기 시작한 나뭇가지와 푸른색을 띠기 시작한 잔디 위론
고즈넉함이 깃들었다.
한 무리의 참배객과 이따금 사잇길로 거닐던 사람들도 뜸해져 드넓은 묘역이 다시 찾아든 고요함에 한결 호젓하다.
문득 우거진 숲 사이로 버려진 마른 잡목들에서 소슬함을 느끼며 이곳이 도심 속임을 새삼 생각한다.


 오랜만에 입은 어색한 양복의 옥죄임과 조문길의 부담감이 거추장스러운 상의와 넥타이를 풀었더니 한층 가뿐하다.
양복바지에 풀물을 묻히고 다닌다는 소리는 면해야 할 것 같아 관리실에서 집어온 전단을 깔고 잔디 위에 앉으며
오전의 채비를 돌아본다.
 
 어긋났던 시간이 고마워지고 시간 내에 도착하기 위해 서둘렀던 조바심이 쑥스럽다.
망인을 기리고 애도하는 절실한 조문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생각에,
문득 이 의례적인 추모와 몇 푼의 조의금 봉투가 낯설게 여겨진다.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행위가 자극에 따라 반응된 결과물이라면 지금의 이 느낌은 어떤 자극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
다만, 매사 적극적이었던 고인의 삶이 저쪽 너머 또 다른 세상에서도 평안하길 빌어야겠다.



 끝없이 줄지어 서 있는 저 무심한 묘비들,
형태와 재질의 다양함은 생전의 삶이 제각기 달랐음을 보여 주는데 생을 마감한 뒷모습의 또 다른 다름,
이 또한 부질없음이다.
떠난 사람들에게 바쳤던 안타까운 흔적들이 바래고 희미해져 이제는 잊힌듯한 저 묘비들.
소중했던 순간들을 사진으로 남기고 그 인연과 추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꽃을 꽂고 묘비를 세우고
애달픈 비문을 남겼을 것이다.


 R.I.P.   Beloved,   Forever,  In memory  ... (고이 잠드소서, 사랑해, 영원히, 잊지 않을께 ...)
이 염원을 담은 메시지는 살아있는 자들이 바치는 간절함과 그리움이었을 테지만,
이곳에 묻힌 이들에게는 그 어떤 의미로 함께하였을까.

불현듯 지난 일이 떠올라 그만 애잔하다.
선친의 임종을 함께하지 못했던 나에게 가족들은 비문의 글귀를 나의 몫으로 남겨 두었었고,
그때도 누이들의 발갛게 물든 눈시울 뒤로 모란공원의 하늘은 오늘처럼 맑고 눈부셨었다.
 
 이름 모를 망자들 사이에서 또다시 마주한 지인의 죽음을 대하고,
산자의 눈으로 죽음을 바라보아야 하는 낯선 장소와 혼자만의 공간 때문일까,
겸허한 마음속에 어느새 겸손해진 자신을 본다.
생이 유한하다는 명제는 누구나 죽는다는 것이겠지만, 어느 누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초연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나도 죽을 것이고 너도 죽을 것이고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던 이들도 죽을 것이라는 생의 유한을 깨닫고 인정할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의 본질과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삶, 산다는 것이 두 손을 맞잡고 교감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 넘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삶을 인도하는 성직자들의 가르침은 옳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결국 몰(歿) 하여 사멸되는 것.
선종, 소천이라 에둘러 말들 하지만 다만 산 자들의 애달픔일 뿐.


 욕망과 연(緣)을 털고 정진하는 구도자들의 청빈한 삶처럼 우리의 일상이 어떤 특별한 의미나 고매한 무엇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곧고 반듯했기보다 구부러지고 휘둘리며 많이도 고집스럽게 살았다.
어디에 있는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갖기위해 저질렀던 거짓과 위선은 또 얼마만큼이나 될런가. 
탓하지 말며 애써 가려내지 않을 그래서 흐르는 물처럼 거스르지 않을 수 있다면,
언젠가는 다가올 생의 끝자락에서 욕되게 보이지 않을 오롯한 삶일 수 있을까 ?


 망자들의 흔적이 이제는 산 자들의 짧은 메시지로만 남겨진 곳엔 참배객이 남기고 간 꽃들이 소담스러운데,
오늘,

한 죽음을 유족들은 가슴에 묻을 것이고,
나는 이곳 세상의 눈 부신 햇살 아래에서 단지 양복바지 풀물 걱정을 한다.


 어느 시인은 묘비 대신 해바라기를 심어달라고 했었지만,
나는 어떤 비문으로 남겨질 삶을 살고 있는가 ?
 
 고즈넉한 묘역에 이른 봄의 햇살이 많이도 부시다.                 (Mar.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