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마누라, 아들, 며느리 모이면 싸우기나 하지

단풍들것네 2019. 10. 13. 03:57

시월은 변덕스럽다.


잠깐 내린 비에 얇은 옷이 몸에 감기어 찬 기운에 움츠려 든다.

젖은 나뭇잎도 발에 걸려 거추장스러운데

거세게 바람마저 일어 도로엔 낙엽이 뒹굴었다.


계절이 지나가는 아쉬운 자국.


기온이 많이 떨어져

이른 아침에는 손이 시렸다.


부지런한 사람들의 두터운 옷차림에 마음이 바빠지니

손보아야 할 일거리를 꼽아 보게 되지만,

잊지 말고 먼저 긴팔 재킷과 얇은 장갑이라도 챙겨야겠다.



움츠려지는 출근길의 돌아 나오는 길목,

운전대를 잡은 팔꿈치 관절에서 뚝 하는 소리에 통증을 느껴

엉겁결에 겨우 한 손으로 운전을 했다.


무리하지 말고 하루쯤 쉬라며

눈이 동그라졌던 아내.


뜨거운 물에 수건을 적셔 찜질을 하고 오전내 주물렀더니

조금 풀리는 것 같아,

천천히 팔을 굽혔다 펴고, 조심스럽게 기지개도 켜보고

추스를 만하여 한결 숨쉬기가 편하니

탈골 같은 큰 문제가 아님을 고마워해야겠다.


 

모처럼 메이지 않는 시간이다.

집 뒤의 숲을 찾아 한가한 마음으로

머릿속으로만 맴돌았던 은퇴 후의 계획을 메모지에 좀 적어 보아야겠다.


변덕스러운 날씨지만,

오후엔 따사로운 햇볕이 비추어 맑은 하늘이 넓고도 깊어 보이고,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으니 상쾌한 기운에 더없이 편안하다.


찬서리 내려 깊어가는 계절이지만,

아담한 숲속엔 청량한 기운이 그윽하다.

이처럼 시원하고 정갈한 솔향을 언제쯤 안아 보았는가.


과육의 부드럽고 향기로운 향이라기보다는,

난치는 여인에게서 풍기는 묵향같이 담백하고,

찬 빗으로 빗어넘긴 쪽진 머리의 여인에게서 풍기는 자태인 양,

귀한 듯 정갈한 솔내음에 바쁘기만 했던 심신이 씻기어지는 느낌이다. 




솔방울 하나가 떨어진다.


쭉 벋은 가지 끝에

갈색의 솔방울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달려있다.


아마 이 나무가 전나무 일 테지,

새삼 뒤뜰 너머에 곧게 벋은 나무가 많음을 깨닫는다.


이 나무가 전나무인지 확실치 않지만,

크리스마스트리용으로 많이 사용한다는 나무인데,

바닥에 수북이 떨어져 있는 이것을 솔방울이라고 하는지

열매라고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상록수의 일종 일 테니

사시사철 낙엽이 들지 않은 나무다.



바닥에 떨어진 솔방울 몇 개를

메모지 위에 올려놓고서 유심히 살펴본다.





사람들은,

이런 상록수의 늘 푸르름을 꼿꼿한 기개를 상징한다고 하지만,

나무가 무슨 기개가 있을까,

말 많은 사람들이 괜히 하는 말일 것이다.

 

늘 푸르게 보이는 이면엔

모진 바람을 피하려 나뭇 잎사귀는 뾰쪽하고 날카로워져야 했고,

싹을 띄워야 하는 열매는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할 테니,

이렇게 켜켜이 단단한 껍질로 동여메어야 했을 것이다.



아내가 이 솔방울을 보면 무엇이라고 할까?


오래전,

상품용으로 준비했던 솔방울을 창고에 보관한 적이 있었는데,

이듬해 다람쥐가 그 많던 솔방울을 전부 헤집어 놓아 못쓰게 만들어 놓았다.


솔방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다람쥐의 먹이가 될만한 어떤 것이 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지금 숲속엔 솔방울이 지천으로 늘려있으니

일교차가 많은 날씨지만,

이 계절이 아직은 다람쥐에게 여유가 있는 시간인가 보다.



정갈하고 고요한 숲속도

자세히 살피면 사람들의 세상과 다름없어 보인다.


까만 털의 청설모가 꼬리를 부채처럼 흔들더니,

쏜살같이 전나무 사이를 뛰어 돌아다니며

나뭇가지에 앉았는 새들을 공격하고 있다.

들짐승이 날짐승 보다 행동이 빠르다.

새들도 경계의 신호인지 연신 지저귄다.



숲속도 세상 못지않게 다툼이 시끄럽지만,

그래도 숲속이 한가하고 고요해서 편안하다.


발걸음 바쁜 사람들로부터,

갈라진 샛길에 홀로 벗어난 듯,

일상에서 비껴 앉아보니,

작은 잘못과 소소한 그름이 낯설게 여겨지기도 하는데,


뚝 하고 떨어진 솔방울,

저 녀석 탓에

오늘도 은퇴 후의 계획이 생각으로만 그칠 것 같으니,

메모지에 적는 계획은 그만 두어야겠다.



 

지저귀는 새는 짝짓기가 그리운 것이 아니고,

다람쥐와 청설모는 크기부터 틀리고,

귤과 오렌지의 맛도 살펴보고,

콩나물과 숙주나물의 대가리 크기도 가려보고,

파와 마늘의 냄새도 구별해보고,

전나무와 소나무의 잎사귀도 만져보고,

노란 단풍이 빨강 잎사귀보다 황홀하고,


뒤뜰 주변의 연못에 새벽마다 물 안개가 장관이라니 일찍 일어나면 행복할 것이고,

평생 사람들을 미워만 했으니 이젠 조금만 미워하면 될 것이고,

습관처럼 퍁었던 거짓도 이젠 몇 마디면 족할 테고..


가끔 숲속에서 솔내음도 맡으면,

개안쯤은 아니라도 세상을 보는 시야가 조금은 넓어질 테니.


정 씨처럼

마누라, 아들, 며느리랑 겨울마다 플로리다로 골프 치러 가지는 않더라도,


세상일에 귀 기울일 때에는

스쳐 보내기만 했던 생각을 보듬어 본다면,


혹시나,

내 은퇴 후의 삶이 그렇게 고단하지는 않을지 모르겠다.